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원종(元宗, 1580~1619년)은 서자 출신으로 생전에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닌 인헌왕후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인조가 왕위에 오름에 따라 추존왕이 된 인물이다. 생전에는 영창대군, 임해군, 광해군과 같이 정원군(定遠君)이라 불렸다. 인헌왕후와 함께 그가 잠들어 있는 김포장릉(莊陵)의 묘비에는 그에 대해 ‘어려서부터 용모가 출중하였고 태도가 신중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쓰여 있으나, 선조실록에는 그를 광해군의 형 임해군과 함께 선조의 아들 14명 중 최악의 망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원종이 생전에 정확히 어떤 성격의 인물이었는지 판단하기에는 쉽지 않다.
왕이라 불리지만 낯선 이
김포 장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참도가 경사져있다.
아들 인조 때 조성된 그의 묘호에는 ‘종’이라는 글자가 붙어 왕의 칭호를 얻고 있지만, 오늘날 ‘원종’이라는 칭호는 낯설게 느껴진다. 아마도 성종의 아버지 덕종, 헌종의 아버지 익종 등과 함께 추존왕이기에 그럴 것이다. 사후에 붙여진 낯선 묘호와 함께 그에 대한 생전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엇갈리는 부분이 많아 원종은 후대에 더 낯설게 느껴진다.
먼저, 그의 묘비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살펴보면 임진왜란 당시 원종은 부왕 선조를 모시고 온갖 험난한 일을 겪었으나 어린 나이에도 의연한 태도로 대처하여 모두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대대적으로 공신을 봉하는 목록에 정원군 원종은 호성공신의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 호성공신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피난길에 함께했던 인물들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생사를 함께한 사이인 셈이다. 여기에 정원군은 이항복과 정곤수 등의 1등 공신에 이어 서해 유성룡과 함께 2등 공신의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은 이보다 한 단계 아래인 3등 공신이었다.
그러나 전란 속에서 부왕을 보필하며 공신의 목록에 이름을 올린 원종이지만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602년에는 정원군의 궁가들이 비리를 저질러 한성부가 시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본부의 신구안(新舊案)에 딸린 차부(車夫)가 11명인데 1명은 임해군(臨海君), 1명은 의창군(義昌君), 2명은 정원군(定遠君)의 궁가(宮家)에 투탁하여 모두 공가(公家)의 역을 하지 않습니다. 본부에서 한 번이라도 차역체문(差役帖文)을 발송하면 반드시 고소하고 본부의 색리(色吏)와 색장(色掌)을 잡아다가 매를 때리고 가두는 등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단속하지를 못하니 지극히 민망합니다. 지금부터는 투탁하여 본역을 하지 않은 자는 일일이 형조에 이문하여 형추하는 것으로 각별히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정원군이 그의 궁노를 멋대로 놓아두어 하원 군부인(河原君夫人)을 구금했는데도 궁노를 추문하지 못했으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왕자들의 폐단이 한결같이 이렇게까지 극도에 이르러 원망이 상에게 모이니, 한탄스럽다. 자식을 의로운 방도로 가르치는 것을 옛사람이 귀하게 여긴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다.
<선조실록 155권, 35년(1602년 10월 20일)>
장릉에는 정원군과 그의 비 인헌왕후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이 밖에도 궁노(宮奴)들의 횡포를 방관하는 등 정원군의 방탕한 생활에 대해 탄핵하는 기사는 선조실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선조는 그때마다 감싸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된 정원군의 횡포는 결국 선조와 조정의 많은 대신들을 돌아서게 만들었다. 특히,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면서 임해군, 정원군과 함께 선조의 머리를 아프게 한 순화군의 죽음을 기록에서도 정원군의 부정적 평가는 계속되었다.
이보(李補)가 졸하였다. 보는 왕자다. 성질이 패망(悖妄)하여 술만 마시면서 행패를 부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비록 임해군(臨海君)이나 정원군(定遠君)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虎患)을 피하듯이 하였다. 이에 양사(兩司)가 논계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안치시켰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상이 특별히 명하여 그의 직을 회복시켜 순화군(順和君)이라 하고, 익성군(益城君) 이향령(李享齡)의 아들 이봉경(李奉慶)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선조실록 209권, 40년(1607년 3월 18일)>
정원군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으면 연쇄살인범이나 다름없었던 순화군이 낫다는 기록이 쓰였을까. 하지만 그런 정원군에게도 큰 아픔이 있었으니 바로 아들 능창군의 죽음이다. 광해군 재위 시절 익산에는 평소 간사한 행동을 일삼고, 음모를 잘 꾸미기로 소문난 소명국의 음모로 능창군은 신경희가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모에 휘말리게 되고 결국 강화 교동으로 유배를 떠난 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때문에 원종 역시 화병을 얻어 1619년 12월 세상을 떠나니 이것은 훗날 1623년 인조반정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임진왜란에서 아들의 죽음까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부왕의 곁을 지킨 공신에서 천하의 망나니까지. 웬만한 역대 임금들 보다 많은 이야기를 남긴 원종은 생전에는 고단한 삶이었을지 모르나 사후 아들에 의해 추존왕까지 되어 왕릉에 잠들어 있다. 그가 잠든 김포장릉(莊陵)에는 원종과 그의 비 인헌왕후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놓여있는 참도가 보통의 다른 조선왕릉과는 달리 경사진 계단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병풍석이나 난간석 없이 봉분은 나지막한 호석(護石)만 둘러져 있다.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의 묘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이를 통해 그가 생전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쌍릉의 형태를 띠고 있는 장릉의 능역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규모이다.
장릉 내에는 작은 연못과 함께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 좋다. 특히, 봄이면 진달래가 능 전체를 장식하고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임진왜란 속에서 인조를 보필한 공신인가, 방탕한 생활을 하던 망나니인가. 정원군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엇갈리고 있습니다.
글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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